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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pressions/책(Book)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 월터 아이작슨(전기)

안녕하세요.

오늘은 알버트 아인슈타인 책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Albert Einstein

월터 아이작슨이 쓴 전기로

월터 아이작슨은 2012년 미국 타임지에서 선정한 100인에 선정되었고

미국의 언론인이며 CNN 최고 경영자로 활동하였습니다.

월터 아이작슨은 벤자민 프랭클린, 스티브 잡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훌륭한 인물들의 전기를 쓰는 작가로 널리 알려져있습니다.

 

내용 요약 -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았으며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독일의 시골에 살던 유대인들은 19세기 말부터 산업 중심지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부모님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헤르만은 사업가로서 깃털침대 사업을 하다가 나중에는 발전기 사업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사업에 참여해주길 바랬지만 아인슈타인은 공학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취리히 폴리테크닉에 입학하게 됩니다. 그는 독일의 권위주의적 학교와 군국주의적 분위기를 싫어하여 독일 국적을 버리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1896년 1월 무국적상태가 되고 종교적 소속도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밀레바 마리치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밀레바 마리치는 아인슈타인보다 세 살이나 많고, 선천적인 장애 때문에 절룩거리는데다가 결핵과 우을증에 잘 걸리고 용모와 성격에서 좋은 평을 못 받았으나 아인슈타인에게는 매력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무국적 상태로 4년이 지났고 스위스 시민이 되기 위해서 매달 일정액을 저축했다.

 

 

스위스의 제도, 민주주의, 개인과 사생활을 지극히 존중해주는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이 그가 스위스 시민권을 원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그는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지 못했던 것은 일생에서 놀라운 사실 중의 하나이다. 그가 초급 교수의 자리를 얻게 된 것은 1900년 취리히 폴리테크닉을 졸업하고 나서 9년, 그리고 물리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고 박사학위도 받았던 기적의 해로부터 4년이 지난 후였다. 아인슈타인은 취업을 위해 교수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아버지도 교수 오스트발트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아들에게는 알리지 않고, 아주 특별하고 어려운 노력을 했다. 오스트발트는 답장을 하지 않았지만, 9년 후 그가 아인슈타인을 청므으로 노벨 상에 추천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멋진 아이러니다. 아인슈타인의 학우 친구인 그로스만은 베른에 있는 스위스 특허사무소 심사관 자리에 아인슈타인을 추천했다. 그로스만의 아버지가 소장을 알고 있었다. 1902년에 그는 특허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는 하루의 일을 한 시간에서 세 시간 사이에 마칠 수가 있었고, 남은 시간에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한 일을 할 수 있었다. 1905년 그가 보여준 창의성의 폭발은 놀라웠다. 다양한 논문을 적어냈고 상대성 이론과 E=mc^2(에너지=질량*광속^2)과 같은 훌륭한 공식을 만들어냈다. 이후에 솔베이 회의나 마리치와 이혼하고 엘자와의 결혼 그리고 세계1,2차대전이 일어나는 와중에 그의 생각들과 행적들... 나중에는 결국 미국으로 가서 미국 시민권자가 되고 세계 평화를 위해 많은 기여를 하였다.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관점, 과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 그리고 모든 개념적 관념들이 단순명료하면서 인상깊었다. 자유에 대한 철학과 진리에 대한 강한 애착심, 그로 인해 비롯된 권위와 권력에 대한 강한 반발력 등이 아인슈타인을 이끌어 낸 강한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사실 

1. 아인슈타인은 어릴 적 남들보다 성장이 더디었다고 한다. (아주 늦게 말을 배움.)

2. 아인슈타인은 폴리테크닉 학교에서 물리학 교수인 장 페르네에게 가장 낮은 학점인 1점을 받았다. (낙제됨) 아인슈타인이 강의에 거의 출석하지 않았던 것이 부분적인 이유였다. 어느 날 그는 실험과정이 적힌 서류를 받았는데 독립심이 강한 아인슈타인은 서류를 휴지통에 던지고 자신의 방식으로 실험을 했다고 한다. 

3. 아인슈타인은 음악을 좋아하는데 특히 모차르트의 음악을 아주 사랑한다. 바이올린을 실제로 잘 연주했다. 

4. 그는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무국적 상태로 지내다가 나중에는 스위스 시민권을 획득하고 나중에는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된다.

5. E=mc^2 질량 1킬로그램은 대략 250억 킬로와트시의 전기로 변환된다. 건포도 한 알의 질량에 들어 있는 에너지는 뉴욕 시 전체가 하루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6. 아인슈타인의 아들 중 한 명인 에두아르트는 정신병으로 인해 정신병동에서 오랜 시간 지냈다.

7. 마리치와의 이혼을 위해서 그녀에게 노벨상을 받고 그 상금을 다 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8. 자신의 첫 아들인 한스는 한스의 딸(아인슈타인의 손녀)이 아인슈타인과 특수한 관계(사랑)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9. 아인슈타인은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그 사실이 1922년 11월에 아인슈타인에게 알려졌다. 노벨상을 받게 한 논문의 내용은 상대성이론이 아닌 그의 광전자 효과법칙의 발견이었다. 1910년에 오르스발트가 처음으로 아인슈타인을 추천했다(특수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당시의 스웨덴 위원회는 순수 이론가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1919년 11월 아인슈타인의 이론의 일부가 확인되었고 1920년은 그의 해가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치가 개입하기 시작했다(반유대운동 등). 여기서 카를 빌헬름 오센은 1922년 위원회에 합류하여 상대성 이론의 문제 전체가 논란으로 뒤덮여 있으므로 다른 전략을 시도했고, 관정자 횩과법칙의 발견으로 아인슈타인에게 상을 줄 것을 요청했다. 1921년 아인슈타인에게 상을 수여하면 1922년 닐스보어에게 상을 함계 시상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고, 이 의견이 받아들여졌다.

10. 당시에 미국으로 건너간 아인슈타인에 대한 경계로 FBI에서 아인슈타인의 정보를 수집했는데 엉터리 정보가 많았다고한다. (그의 가족관계 등의 정보)

11. 아인슈타인은 이론을 정립하는 것까지만하고 실험은 남들에게 위탁했다. 그는 실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생시절 실험하다가 사고로 다쳤기 때문이다. 또한 이론을 실험 해줄 사람들은 자신 말고도 세상에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대성이론 -

자유낙하하는 관찰자가 느끼는 것에 대한 사고실험으로 가속과 중력장에 의한 국부적 효과를 구분할 수 없다는 원칙을 정립했다. 창문이 없는 밀폐된 상자 안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발이 바닥을 향해 눌리는 것처럼 느낀다면, 그는 상자가 우주에서 위를 향해 가속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중력장안에서 정지해 있기 때문인지를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밀폐된 상자안에서 떠 있는 것처럼 느끼는 여자도 상자가 자유 낙하를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상자가 중력이 없는 우주 공간에 떠 있기 때문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아인슈타인은 중력 이론을 정복하고, 상대성을 일반화하기 위한 시도를 이끌어줄 '동등성 원리'를 정립했다. 훗 날 그는 상대성 원리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경우는 물론이고, 속도가 변하는 시스템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확장하거나 일반화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동등성의 결과 중 하나가 아인슈타인이 예측했던 중력이 빛을 휘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가능성은 상자에 대한 사고실험을 이용해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상자가 위쪽으로 가속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레이저 빔이 한쪽 벽에 있는 바늘구멍을 통해서 들어온다. 그 빛이 반대쪽 벽에 도달할 때가 되면 상자가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빛은 바닥에 조금 가까워진 위치에 닿게 된다. 상자가 위로 가속하는 경우, 빛이 상자를 가로지르는 궤적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 궤적은 곡선이 된다. 더욱이 동등성 윈리에 따르면, 상자가 위로 가속되거나 중력장에서 정지해 잇는 경우에도 그런 효과는 똑같이 나타나야만 한다. 따라서 빛이 중력장을 지나가면 휘어지는 것처럼 보여야만 한다. 1911년 이런 원리를 밝혀내고 4년이 지난 1915년 그의 천재성은 정점에 이르렀다. 아인슈타인은 일련의 계산을 통해서 빛이 태양 근처의 중력장을 통과할 때의 결과를 예측했다. "태양 근처를 지나가는 광선은 원호의 0.83초만큼 휘어진다"